3.1운동,이북(평양) 핵심지-남산현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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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1174130,혜촌 김학수화백

 

위 그림은 혜촌 김학수 화백님이 1985년 선교100주년을 기하여 그리신 그림으로

남산현교회에서 3.1운동을 벌인역사를  설명하셨습니다.

김학수 화백님은 평양 성화신학교 교수님이셨습니다.

 

이 남산현예배당이 성화신학교의 중심된 場이었습니다.

남산현교회는 뿐만아니라 평양을 중심으로 한 1919년 서북지방 독립운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즉 평양남산현교회는 지리적 위치상으로도 기독교인의 역할로도 이북의 중심지였습니다.

 

남산현예배당 좌측면과 강단좌측면

남산현예배당 좌측면과 강단좌측면

남산현예배당 우측면과 강단 우측면

남산현예배당 우측면과 강단 우측면

 

(건물설계도를 살펴볼 때에 현관을 바라보면서 오른쪽과 왼쪽을 정하여,  현관을 볼 수 있는 곳의 위치를 정면도라고 하고,

현관 왼쪽을 좌측면도라고 하고, 오른쪽을 우측면이라고 하고, 뒷쪽을 배면도라고 한답니다.)

 

더불어 남산현교회의 교세와 활동에 관한 관련글을 붙입니다.

글을쓰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양해를 구하며 함께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려는 분들께 도움을 드렸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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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청운문학선교회의 홈페이지에서 받아왔습니다.

http://home.cwch.net/club/moonhakcwch        최상호                    2007.03.11

1893년 홀 선교사와 김창식 등 한국인이 평양에 설립하였다.

본 건물은 1912년에 건립된 예배당의 모습으로 남산현교회와 장대현교회, 숭덕학교를 중심으로

관서지역 3.1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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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한국감리교회에서 이북 관련 글과 책을  쓰셔서 알려주시는 김진형 목사님의 글을 함께 보고저 합니다.

양해를 부탁드리며 감사드립니다.

남산현 교회와 평양의 선교부 <기독교타임즈>2002.09.23(월)

서문 밖에 있었던 감리교회에는 청일전쟁이후 해마다 교회를 증축해야 할 정도로 교인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특히 1896년 부임한 노블(W.A.Noble)선교사의 열정적인 사역으로 그 증가폭이 훨씬 두드러졌다.

한옥 집의 형태였던 초기의 예배당은 방을 헐어 늘려 나가거나 방을 새로 짓는 방식으로 예배당을 증축하였으나 밀려오는 교인들을 수용할 수 없었다.

1897년에는 44명이 세례를 받는 예식이 있었는데 집례하는 노블이 사람들을 올라타고 다녀야 할 정도로 비좁았다.

 

이런 형편이어서 시간을 나누어서 예배를 드렸으나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체교인들이 예배를 드릴 때에는 방문을 열고 예배를 드렸다.

늦게 온 교인들은 할 수 없이 마당에 깔아 논 멍석에 앉거나 아니면 서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1900년 노블은 연례회의에 참석하여 평양 감리교회의 눈부신 부흥을 보고하면서 적어도 6백명 이상은 들어갈 수 있는 예배당을 지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교인들이 계속 증가하여 그 배인 1천2백명이 들어갈 정도여야 한다고 보고하고 조속한 건축을 시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회의를 주재하러 온 무어(D.H.Moore)감독은 이 계획을 승인하면서 직접 평양을 방문하여 기공예배를 주재하였다. 감독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8백명이 넘는 교인들이 다 나와 멀리서부터 도열하여 감독을 맞았다.

그리고 남여를 구분하게 마당에 질서있게 앉아 감독의 설교를 들었다. 무어 감독은 평양교인들의 역동적인 신앙에 무척 고무되어 이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다.

 

미국에 돌아간 감독은 사진과 함께 한국교회의 열정을 소개하면서 미국 선교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내었고,

노블 역시 가족과 친구에게 편지하여 적지 않은 선교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새로 지은 예배당은 1903년 평양의 중심인 남산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서양식 붉은 벽돌집으로 1백50평 정도의 규모였다. 그 때야 맨 바닥에 앉으면 1천명은 능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노블은 이 예배당이 감리교와 장로교회를 통틀어서 제일 큰 예배당이라 자랑하였다.

 

평양의 중심지 남산에 우뚝 선 남산현 교회는 평양이 기독교 도시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깃발과 같았다.

더욱이 대문은 우리 고유의 전통양식인 기와지붕으로 고풍스럽게 지었고,

예배당 앞에 별도로 높은 종탑을 쌓아 전체적인 조화가 돋보이게 하였다.

남산현 교회에서 보면 평양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고, 반대로 산밑 평양 시내에 사는 사람들은 어디서도 이 교회가 보일 정도였다.

그 때야 어디 서양식 건물이 전무한 상태였으므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 것은 당연하였다.

산 위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평양주민들의 심령을 깨우기에 충분하였다.

북한의 교인들은 이 예배당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으며 평양에 오면 순례자처럼 이 교회를 들려 구경하고 하였다. 예배당 그 자체가 선교의 가장 효율적인 도구였던 시대였다.

 

1900년대 들어서 평양의 중심부인 남산 일대는 남산현 교회를 중심으로 감리교 선교기지(Station)가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교회 주변에 넓게 자리잡은 노블의 한옥 주택이 있었고, 남산현 교회와 비슷한 시기에 서양식 벽돌의 여선교사 주택도 들어섰다.

이미 건축되었던 기홀병원과 광혜여원, 그 부속 건물로 평양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던 에스 마가렛 어린이 병동이 들어서 있었다. 또 서양식 건물은 아니지만 남자와 여자를 학교가 그 자리를 점점 넓혀 가고 있었다.

 

김진형목사(예산지방 죽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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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촌 김학수 화백님을 조묘희 목사님께서 알려주신 바를 소개하여 드립니다.

 

“김학수 화백님은 평양 성화신학교 교수였습니다 (평양성화신학교:교장 배덕영 목사 /  학감 박대선 목사)
또한 박대선 목사님이 담임 목회하신 서평양감리교회 장로/교회학교 교장님이셨고

본인(조묘희 목사님)은 중등부학생이었습니다. ”

<역사풍속학자 혜촌(蕙村) 김학수(金學洙 2010년 6월 소천 90)화백  >
1919년 평양에서 태여난 김 화백은 이당(以堂) 김은호와 소정(小亭)변관식을 사사했고,

‘금강도’ ‘삼강행실도’ ‘광대줄타기’ ‘의사 안중근’ 등 역사풍속화를 비롯해 산수화-의인화를 주로 그려왔다.

1964년부터 2006년까지 한강과 그 일대를 현장 답사하며 화폭에 담은 유명한 ‘한강전도’를 남겼다.

한강 1,300리를 폭 48cm, 길이 20m 가량의 화선지 두루마리 26개에 옯긴것으로 길이만 350m 가까이에 이른다.

蕙村은 또 한국외항선교회 창립멥버로 참여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성화를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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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진 목사님의 혜촌 김학수 화백과 남산현교회 관련 기술과 그리고 혜촌의 일대기  약술을 함께 봅시다.

김수진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가족을 그리워하며 그림 그린 화백 김학수 장로>

김학수(金學洙, 1912~2010) 장로는 모태신앙으로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의 학력은 신흥학교 4년 졸업이 전부다.

청소년기에는 평양 경창문밖교회와 장대현교회를, 장성한 후에는 서평양교회(당시 박대선 목사 시무)를 다녔다.

미술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던 그는 1937년 ‘묵난 작품으로 일본 동경 남화회전’에 당선되면서 서서히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39년에는 이정란을 만나 결혼했다.

1942년 이당 김은호(金慇鎬) 화백의 문하생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여기에 선전(鮮展)을 비롯해서 여러 번 입선을 했다.

6·25전쟁이 나자 머지않아 수복한다는 말만 믿고 가족을 남겨두고 혈혈단신 월남하여 부산에 정착하였다.

당시 부산에서 피난민들이 중심이 되어 부산시온교회(시온중앙감리교회)를 창립하였다.

서울이 수복되자 동대문에 서울시온교회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으며,

이러한 공로로 1967년 서울시온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그는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물과 조상들의 생활 풍속을 담은 예술성이 짙은 그림을 발표하는 데 정력을 쏟았다.

또한 이런 달란트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독교 미술인으로서 성화 풍속도에 정력을 쏟기도 했다.

그는 미술계에서도 인정받아 1966년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를 창립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이때 신세계화랑에서 ‘한국풍속화’ 전시회를 가졌다.

혜촌(惠忖) 화백의 독특한 성화는 한국적인 성화로서

예수 주변의 인물과 배경을 모두 우리 한국의 것으로 하였는데

오직 예수만은 유대인의 옷을 입은 사람으로 그려 놓았으며

주변의 청중들은 모두 한복을 입은 그림으로 한국 토착화 작품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성화는 교계신문의 성탄절과 부활절 특집호, 교계잡지의 표지화로 많이 등장하면서 더욱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혜촌의 주요 작품들을 보면 풍속화로는 ‘시장도(市場圖)’, ‘능행도(陵幸圖)’가 있고

역사화로 ‘한양도(漢陽圖)’와 ‘경복궁도(景福宮圖)’가 있다.

역시 그가 장로로 활동하고 있기에 한국적인 성화는 독특한 면이 있다.

여기에 예수의 일대기 연작으로 30점이 있으며, 기독교한국선교역사화 37점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남대문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문 두드리는 예수님’ 등이 있다.

1984년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을 맞이해서는 100점을 완성하여 발표도 하였다.

이렇게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면서도 북에 두고 온 부인과 자녀들(2남2녀)을 잊지 못해 기도할 때마다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부인과 자녀들의 이름을 애처롭게 불렀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북에 있는 가족들을 부르면 영감이 떠올랐고 붓이 가는 데로 성화(聖畵)를 그렸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한창 거론될 때,

6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이북에 있는 가족에게 지상안부를 띄우는 편지를 소개하였다.

그 편지를 읽은 많은 독자들로부터 격려의 연락이 쇄도하였다.

한국교회와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의 격려로

그의 활동 무대는 점점 넓어져 1972년 미국 캔터키 루이스빌대학과 디트로이트웨인대학의 초청으로

미국 5개 도시에서 순회 전람회를 하였다.

미국인교회뿐 아니라 한인교회에서도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1979년 뉴욕에 있는 한인들을 중심으로 뉴욕한국화랑에서 초대전을 갖기도 하였다.

그의 성화를 일부 사람들만 보기에 아깝다고 생각했던 박대선 당시 연세대 총장의 부탁으로,

‘예수의 생애’라는 주제로 40점을 비롯해서

‘선교’라는 주제로 23점, ‘의료와 교육’이란 주제로 23점, ‘순교 박해’란 주제로 8점을 그려 완성하였다.

이상의 모든 그림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 모든 성화 저작권 및 출판권을 진흥문화사 회장인 박경진 장로에게 위임하였다.

그리고 박경진 장로는 이 모든 성화를 엮어 한 권의 성화집으로 발간하였다.

혜촌 김학수 성화집은 모두 4부로 분류되었다.

여기에 다 소개를 할 수는 없지만 한국기독교역사와 직접 관계 있는 부분을 소개하면,

‘선교’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오신 예수님’ ‘예수께로 가면 기쁘리로다’ ‘

하멜의 제주도 도착’ ‘최초의 소래교회’

‘귀츨라프 선교사의 상륙지인 고대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제물포항 상륙’

 ‘대동강변 노방전도’ ‘평양 장대현교회’ ‘평양 남산현교회’

‘정동교회’ ‘새문안교회’ ‘상동교회’ ‘강화읍 성공회’,

그리고 서상륜·이수정·김창식·길선주·최봉석 목사, 조만식 장로 등 인물과,

교육의료파트는 ‘평양 숭실학교’ ‘예수학당’ ‘배재학당’ ‘이화학당’ ‘보구여관(이대부속병원)’ ‘광혜원’

‘YMCA 회관’ ‘평양 장로회신학교’ ‘감리교협성신학교’ ‘연희전문학교’ 등이 있다.

끝으로 ‘순교와 박해’의 장면은 ‘천주교 새남터’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장면’

‘3·1운동의 현장이었던 제암교회’ ‘주기철 목사의 순교 장면’을 모두 편집하여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엄청난 작품을 남긴 김학수 장로는 끝내 그리던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그나마 미국에서 북한을 왕래했던 이승만 목사를 통해 가족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김학수 장로는 자신의 성화를 북한 가족에게 보내기도 했으며,

자녀 중 북한에서 화가로 부친의 대를 있고 있다는 소식도 듣기도 하였다.

김 장로는 결국 가족들을 먼 훗날 하늘나라에서 만날 것을 주님께 부탁하고 서울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그는 장학회를 조직하여 많은 지도자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 중 대형 성화는 경기도 용인시 추계리에 있는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입구에 초대형 성화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성화는 1866년 9월 4일 병인박해 시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 대동강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지만 관헌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장면을 화폭에 담은 것으로,

이곳을 순례하는 모든 순례자에게 새로운 은혜를 전하고 있다.

이 성화는 서울 상동교회에서 기증하였다.

(2010.12.11.한국장로신문/김수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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