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 최초 목사 김기범(1863.8.13-1920.3.27)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6:18)
오늘 아침부터 비가 왔고 바람이 불었다. 우산도 두 개씩이나 준비하였다. 우산 하나는 너무 붉은 색이 나서 장례식에 어울리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검정과 보라가 적당히 배색이 되어 유족에 대한 예의는 벗어나지 않겠나 여겼다. 먼저 제물포웨슬리예배당 복원공사 현장에 가서 둘러봤다. 이 예배당은 존스 선교사가 건축하여 1901년 12월 25일 입당하였고, 한국인 최초목사 김기범이 담임하였던 내리교회의 현 위치에 있었던 예배당이었는데, 1955년 9월 4일 이후에 철거되었다가, 2009년 4월 19일 주일 복원기공식에 가졌으며, 2010년 9월 29일에 신축공사예배를 시작으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나는 이 제물포웨슬리예배당의 마지막 사진촬영에 함께 하였으며,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개척을 시작한 1985년부터 이 예배당 복원을 위하여 준비하였으며, 21년에 걸쳐서 기본복원설계도(재구성도면)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2009년 10월 15일 내리교회 복원위원회에 참석하여 아무 조건없이 그동안 준비한 도면을 제공하였다.
공사 현장에는 비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기초토목공사를 위한 파일 작업차량과 포크레인과 흙 운반 차량이 계속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간 21년간 공들였던 복원설계기초도면과 시공도면을 비교해 보니, 그린대로 주요 부분들을 벗어나지 않고 아주 멋지고 자세히 작성이 되어 있었다. 교회에 둘러서 부친의 친필이 서명된 ‘메시아 악보 3권 1질도 잘 있나’ 살펴보니 다 잘 있었다. 나와 절친한 분의 장례식 참석으로 20분 먼저 왔다. 물론 사진기는 지참하였고.
오늘 2010년 11월 27일 토요일 오전 9시, 김기범 목사의 3대 손자 며느리 한영숙 권사의 장례식이 내리교회 나사렛성전에서 있었다. 장례예문에 따랐다. 주례 박승일 교구목사, 성경봉독 히브리서 11: 8 -16 김병렬목사, 상조회찬양대 조가, “본향을 향하여 ” 설교와 축도 김흥규 담임목사, 흰색 국화 헌화가 담임목사, 부목사, 유가족, 찬양대, 조문객 순으로 있었고, 인천 서구 왕길동 검단 내리 부활의 동산으로 출관하였다.
이곳 검단에는 나의 외조모와 선친과 모친이 장사되어 있는 곳이다. 명절이나 공연히 마음이 섭섭하고 괴로울 때면 담임하는 교회에서 기도도 하고 기도원에 들어 기도도 하였지만, 이곳에 와서 천국을 소망하며 주님의 위로를 받고 가곤 하였다. 그런때면, 김기범 목사 묘비 앞을 지나며 추념하곤 하였다.
오늘도 그랬다. 부활의 동산 초입에 있는 한국 최초 목사 김기범 목사님의 묘비를 앞에 두고 추념하고 지난다. ‘대한민국 최초 목사 김기범 목사의 묘와 비’. 김기범 목사님이 한국인으로서 처음 목사 안수 받으셨을 때에 그 마음은 어떠하셨을까?’하는 상념이 떠오른다. 그의 영혼이 소천되시어 몸은 땅에 묻히시고 주님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부활을 기다리시는 김기범 목사님의 흙으로 돌아간 육신, 그리고 이미 주님의 나라에 가계신 그의 영혼을 다시 한번 추모한다. 마음 속 한편으로는 이 양반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어서 내가 이런가? 하는 생각도 하곤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수고한 웨슬리와 아펜젤러 그리고 김기범 목사님의 후예인 한국감리교회 목사님들이 초대교회 한국감리교회 목회자들의 열정을 되찾기를 기도하며, 김기범 김창식 한국 최초 목사 기념예배당을 건립하기 위하여 21간의 제물포웨슬리예배당 복원건축 준비에 5년을 더하여 26년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 부활의 동산에 김기범 목사님의 3대 손자 의사 김영식의 부인 한영숙 권사님이 함께 안식하게 되었다
한영숙 권사님은 내리교회 권사이며, 나의 어머니에게는 의형제로 사신 분이셨다.
1924년 3월 31일 일본 오카야마 현에서 출생하여, 후쿠오까에서 19세에 간호학 공부하고 간호사가 된 한영숙씨는 만주에서 김기범 목사님의 3대 손인 김영식씨를 만나 결혼하셨다.
나의 모친 강복이 권사는 1929년 5월 13일 거제 고현읍에서 출생하여, 외조모와 함께 일본 나고야로 가셨는데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광복이 되자 우리나라에 돌아오셨다. 나의 선친이 마침 내리교회(제물포웨슬리예배당)에 출석하고 있어서, 결혼하면서부터 나의 모친은 교회생활을 하셨다. 서투른 한글쓰기와 말하기였지만, 교회에 와서 성경을 보고, 찬송을 부르면서 한글이 숙달되어 갔다. 한영숙씨는 만주에서 인천 내동 198번지로 이사와서 의사개업을 한 후에, 5살 아래인 나의 모친의 인도로 내리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여 세례받고 입교하였으며 57세에 권사 직분을 받게 되었다. 서투른 한글사용보다는 익숙한 일본어 글쓰기와 대화가 한영숙 권사에게는 위로가 되었으며, 의형제로 30년을 지내게 되었다. 나의 모친은 담임목사님의 일본글 편지를 대신 써드렸으며, 일본 목사님의 일본어 설교 통역도 하셨으며, 일본어를 가르치는 몇 교회들에서 일본어 강의도 하신 때도 있다. 나의 모친이 먼저 2001년 5월 8일에 소천되신 뒤, 이 두 분은 거의 10년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게 되셨다.
나에게는 이 두 분의 일본어 성경들이 남겨져 있다. 갈피마다 닿았던 기도 손 때와 메모가 여기저기에 적혀있다. 나의 모친의 일본어 성경은 「聖書 jbs, 100년 기념, 일본성서협회 1975년, 대형성서(구어)」이고, 한영숙 권사님이 보시던 일본어 성경은 「聖書, 신개역, 일본성서간행회, 1986」이다. 물론 나의 모친은 한글개역 성경전서도 보셨다.
이 분들이 보시던 성경들을 선물로 받아 가끔 들추어 읽어보곤 하였는데… 이제 모두 하나님 나라에 가셔서, 이 땅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계시리라 믿는다. 가끔 인내하기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 나라에 가신 모친과 선친을 생각하면, ‘나도 언제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날이 있을 거야. 내가 이 땅에 있도록 하신 분들도, 저렇게 가시는데, 나도 가는 것이지.’ 하고는 이 땅의 괴로운 일을 인내하고 기도하며 위로를 받곤 하였다. 이제는 나의 모친 의 의형제 한영숙 권사님도 하나님 나라로 가셨다.
1981년 신학교 졸업논문을 쓰던 여름부터 겨울까지 내동 198번지 김영식 내과 3층의 조용한 방을 한영숙 권사님이 빌려주셨다. 한국교회사를 점차 알아가고 김창식 김기범 기념예배당 건립을 추진하면서, 30여년 전 1981년에 신학교 졸업논문을 쓰도록 혜택을 주신 가정이 김기범 목사님의 3대 손의 가정이었다는 일에 놀라며 감사하기도 하였다. 한영숙 권사님은 신학교를 다니던 나에게 가끔 김기범 목사님에 대하여 말하실 때는 ‘김기범 할아버지 목사님’이라고 이름을 말씀하셨다. 나는 나의 모친의 의형제인 한영숙 권사님의 집안 어른이시며 한국최초 목사 김기범 목사님을 기념하는 예배당을 ‘한국기독교 최초 목사 김창식 김기범 기념예배당’(축약, 한목기념예배당)을 건립 추진하게 된 오늘의 마당을 밟고 있다.
목사님과 동역자 여러분, 주님께 기도드리면서 이 기념예배당 건립에 동참하여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이길극 목사 올림.
<김기범 목사 약전>
김기범(金箕範 Kim Ki-pom, 1863-1920)은 아펜젤러가 서울에서 제물포로 파송한 전도자 노병일의 5년간 고생스런 전도의 결실로 내리교인이 되었다. 그가 제물포에 개설되어 운영되던 신학회 4년 과정을 필한 후, 1901년 5월 13일 제4회 제물포 스테이션에서 존스목사가 김기범 전도사를 목사 안수 받을 이로 선교회에 천거한다.
다음날 5월 14일(화) 오후 2시, 스크랜턴(Rev. W. B. Scranton) 목사가 담임하면서 신축한 상동예배당에서, 중국북부연회에 속한 제17회 조선선교회 때에 무어 감독(Bishop D. H. Moor) 집례와 스크랜턴 목사 존스목사 노블목사의 보좌로 김기범은 평양 남산현구역에서 노블 선교사의 천거를 받은 김창식과 함께 집사목사 (준회원) 안수를 받는다.
김기범은 1903년에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고, 존스 선교사 후임으로 1903년 5월부터 제물포웨슬리교회(인천내리교회)를 담임(1903-1905, 1907-1910)한다. 친일적 해리스 감독이 1906년 6월 제2회 선교연회시에 신앙구국적인 Epworth청년회를 정치적 사회참여라는 이유로 해체시켰다. 1908년 6월 제1회 조선연회 시에 김기범목사 담임의 제물포웨슬리교회 요청으로 존스목사가 Epworth청년회 재조직건 상정을 해리스 감독은 거부하였다. 그는 1910년까지 담임하였으며, 신병후 57세로 소천되셨다. 구국적 목회자였던 김기범은 1897년 5월 5일 최초로 조직된 Epworth청년회 제물포웨슬리교회 대표였었다.
외국인 선교사들 만이 집례하던 예배 축도와 성례를,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한국인 토착 원주민 목사인 김기범과 김창식도 축도와 성례를 집례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사적인 에피소드가 김기범 목사에게 있었는데, 한국교회 최초 목사로 당연히 제기할 안건이었다.
김기범 목사가 몸이 좋지 않자 한국인 목사도 외국인 목사 선교사들이 몸이 좋지 않을 때와같이 안식년 유급 휴가를 주어 한국 토착민 목사와 선교사들간의 격을 두지 않기를 요청하였다가 이후 선교사들과 거리가 생기거나 혹은 소외당하기 시작하였다.
피선교국 한국 토착 원주민 김기범 목사님이 선교국인 미국 선교사들에게 첫 번째로 제기한 에피소드였다. 이후 김기범 목사님은 한국감리교회 역사에 별로 나타나지 않게 되셨으나, 최초 목사 김창식 목사님은 여러 기록과 행사에 사진으로도 등장하신다.
혹시나 선교국인 한국교회가 피선교국인 해외선교지에서 김기범 목사님이 겪으신 일과 같은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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