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신학교,1회졸업식,1949.7.6, 평양남산현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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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위치에서 촬영된 남산현예배당

남산현교회-new-앞옆면-종탑

 

성화신학교

한국교계에 큰 영향을 끼친 단명의 신학교

평양 남산현에 설립되었던 성화신학교는 감리교 서부연회에서 직영한 신학교로서

1946년 9월에 설립되었다가 1950년 3월경에 폐교된 단명의 신학교육기관이었다.

이사장 송정근, 교장 배덕영, 교수 박대선, 이재면 김두성, 김용련 윤창덕 등이었다.

비록 감리교라는 교파신학교였으나 장로교의 소속 학생이 더 많이 들어와 공부한 학교로도 유명했는데

그 이유는 몇가지로 정리할 수있다.

1)북한지역에는 감리교회보다 장로교회가 훨씬 많았고,

2) 성화신학교 교수 중에는 장로회 목사(이재면)도 있었으며,

3) 장로회 신학교도 평양에 있었으나

장로회 신학교에는 30~40대의 현직조사 전도사들이 목사안수를 받기 이한 공부였고,

성화신학교는 기독교신자라는 그 한가지 죄로 인해 고등, 전문대학에서 퇴학당한 젊은 학생들이 공산주의에 대한 반발성향으로 들어와 신학을 공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4)공산치하에서 목숨을 걸고 가르치고 배우는 상황에서장.감리교파가 있을 수없었고 오직 뜨거운 열정으로 뭉친 신앙의 일체감만이 있었던 것이다. 이

러한 학생이 본과, 예과, 고성과 합해서 무려 600여명이 들어와 공부하고 있었다.

1946년 9월 3년제로 받은 제 1회 학생들은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정식으로 1949년 7월 6일 종럽장을 받고 교문을 나왔다.

그러나 그해 12월 남산현교회에서 개최되었던 학생들의 성탄 축하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배영덕 교장이 공산당에게 납치되어가고 1950년부터 장로회 신학교와 성화신학교를 폐교 시킨후 양 신학교 학생 120명을 추려서 새로운 신학교를 만든다는 공산정권의 흉계를 알아차린 성화신학교에서는 박대선 교장대리의 지도로 50년 가을절업예정자를 한학기 앞당겨 봅에 졸업시킨후 폐교하고 말았다.

졸업생은 1회20명, 2회11명 모두 31명이었고 재학생으로 월남하여남한의 신학교에서 졸업한 신학생은 수백명에 달할 것이다. 1.2회 졸업생 중에는 북한에서 순교한 이응교,김익두 등이 있고, 월남하여 감독을 지낸 최상봉 목사와 백명호 감독이 있으며, 은퇴한 이로는 한승호, 안덕창. 백만국, 이성해, 화원섭, 백기준, 김덕순, 이재선, 강일화 등이 있다.현역으로는 윤영봉, 조동역, 아는섭 목사 등이 있고, 그 밖에도 남한에 내려와 서울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성결교회에서 목회한 이현영, 일본 침례교 목사가 된 백동호, 예수교회 목사 김희방, 장로회 목사로는 우영낙. 이시문,고운용, 이승만 등이 있는데, 그 중에 신현균 목사는 한국 교계의 부흥사로써 큰 역사를 일으키고 있다.

신학계에도 영향이 적지않다. 감리교신학대학장을 지내고 별세한 변선환 박사, 대전신학교 교수로 별세한 최모순 교수,연세대에서 은퇴한후 교회를 개척하고 있는 이계준 목사 등이 학계에 끼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글: 윤춘병 감독/감리교비사11,주간 기독교세계 9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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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신학교 60년 만에 감격의 첫 동문회

평양 개교 후 5년 만에 폐교… LA서 눈물의 해후

2006년 05월 15일 (월)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유정원 / 미주중앙일보 기자

성화신학교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사그라진 불꽃처럼 채 5년을 넘기지 못하고 없어졌지만 평양의 하늘 아래 그런 신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사라진 신학교가 짧은 시간 동안 뿌린 씨앗들은 뿌리를 내리고 곳곳에서 크고 건실한 나무로 자랐다.

그리고 반세기도 훨씬 지난 뒤 그 열매들이 태평양을 건너 서로 만나 눈물의 해후를 하는 자리가 열렸다.

LA 한인 타운에 자리 잡은 옥스퍼드 팔레스 호텔.

지난 1일부터 은백의 노인 수십 명이 사흘 내내 함께 먹고 자며 예배 드렸다.

모두 일흔의 성상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이들의 모임은 60년 만에 갖는 첫 번째 동문회였다.

캘리포니아는 물론 뉴욕과 뉴저지, 플로리다, 하와이, 워싱턴 등 미주 각 지역과 남미 브라질에서까지 찾아 온

서른 네 명의 남녀 노인들. 모두 성화신학교 해외동문회 첫 모임에 참석한 길이었다.

▲ 반세기가 흐르고 함께 선 스승과 제자, 박대선 전 연세대 총장(왼쪽)과 윤영봉 목사.

성화신학교는 1946년 6월에 평양 수옥리에서 문을 열었다가 한국전쟁 발발을 네 달 남짓 앞둔 1950년 2월 폐교 당했다.

 성화신학교는 해방 직후 나라가 38선을 사이로 두 동강 나자

북한 지역에도 목회자를 육성하는 신학교가 필요하다는 절실한 사명감으로 태어난 신학교였다.

당시 장로교단의 평양신학교가 남아 있었지만 감리교단 신학교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또 이북에는 이미 1천800여 개 교회가 세워져 있어 지속적인 목회자 공급이 시급했다.

배덕영 목사가 신학교를 세우고 초대 교장에 취임했고 박대선 목사가 교감을 맡았다.

1949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제1회 졸업식을 열고 2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치하에서 신학교가 온전할 리 없었다.

 ‘18세 이하 주민에게는 종교 교육을 금지한다’는 포고령이 내려지자

성화신학교는 대응책으로 고등성경학과를 개설했다.

“주일에는 어린이들이 교회를 가지 못하게 노동일이라고 해서 하루 종일 학교에 붙잡아 놓기도 했죠.

그래서 이른 아침과 저녁에라도 성경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적도 있습니다. 고등성경학과는 신학생 중에 열여덟 살이 안 된 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한 계책이었어요.”

▲ 성화신학교 동문들이 60년 만에 처음으로 해외동문회를 만들고 사흘간 우정을 나눴다.

신학교의 2대 교장으로 폐교의 아픔을 감수했고 훗날 연세대학교 총장을 12년이나 지낸 원로 박대선 목사의 회고다.

북한 정권과 성화신학교의 충돌은 결국 순교의 길로 이어졌다.

1949년 성탄축하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배덕영 교장이 정치보위부에 끌려갔다.

지금도 동문회 회보에는 교장 배덕영 목사, 이사장 송정근 목사, 졸업생 이응교 전도사, 김익주 전도사 등

 아홉 명의 순교자 사진이 나란히 실려 있다.

후임 박대선 교장도 세 번이나 투옥을 거듭했다.

전쟁 분위기가 한참 고조되던

1950년 2월 폐교될 낌새를 차린 신학교는 졸업식을 앞당겨 2회 졸업생 12명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는 성화신학교의 문은 영영 닫힌 거죠. 선생과 학생 600여 명은 뿔뿔이 흩어졌어요.

 대부분 월남한 후 다른 신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해 목사가 되거나 장로가 됐습니다.”

씨를 뿌린 학교는 없어졌지만 씨앗은 남녘에서 그리고 바다 건너 미주 땅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감리교신학대 총장을 지낸 김영옥 목사와 변선환 목사도 당시 성화신학교 학생이었다.

변선환 목사는 저명한 신학자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부흥사로 이름을 떨친 신현균 목사와 동양인으로 처음 미국교회협의회 회장과 미국장로교 회장을 지낸 이승만 목사도

 성화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이 목사는 냉전 시대부터 북한을 방문하며 교류의 물꼬를 트는데 앞장서 변화하는 역사를 대변하기도 했다.

이민교회에 남긴 발자취도 만만치 않다.

해외동문회장을 맡은 1회 졸업생 윤영봉 목사는 72년 디트로이트 한인감리교회를 개척했고 지금은 교인이 2천명에 이를 만큼 성장했다.

“당시에는 신학교를 키운다는 정신으로 똘똘 뭉쳤죠.

교장 선생님은 무보수로 일했고 다른 교사들도 박봉을 마다하지 않았어요.

38선이 가로 막히고 외부 원조는 전혀 없이 선생과 학생 모두 고군분투한 게죠.”

그러면서 윤 목사는 이번에 사흘간 동문들과 나눈 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동문들은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했다. 그리고 온갖 질곡의 세월을 헤쳐 오는 와중에 누리고 힘입었던 은혜를 간증했다.

선생님은 아흔을 넘기고 학생은 일흔이 지났지만 세월은 무상하기만 했던 게 아니었다.

완숙한 열매들은 복음의 씨앗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보여주는 더 할 나위없는 증거가 됐기 때문이다.

유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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