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 총리원 천안, 2010 감리교회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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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天 1958년 감독들과 독백

1958 총리원 천안, 2010 감리교회 복원

2010.12.9

저는 총리원과 천안 사람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제가 3살 때였습니다.
이 분들과 독백을 하고 있습니다. 52년 전과 오늘로 오가면서 말입니다.

1958년 12월 22일 주일,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신축예배당 봉헌식에 모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지요?’ ‘여기에는 다 모여 있네요.’
총리원측 류형기 감독, 김종필 신임 감독, 홍현설 학장, 송정률 교육국 전총무, 마경일 전도국 총무, 윤창덕 내리교회 담임목사 그리고 천안측 김응태 감독과 그리고 저 세살박이가 거기 있었습니다. 그 한 때 감리교회 소요를 목격한 그 사람들의 눈이 오늘 2010년 우리를 보고 있네요.

▲ 앞 가운데: 이길극 (3살) 두 번째 줄 : 라이스 선교사, 박완규 장로, 김응태 감독, 류형기 감독, 김종필 신임감독, 홍현설 학장, 송정률 교육국 전총무, 마경일 전도국총무, 윤창덕 내리교회 담임목사 1958. 12.22, 내리교회 신축봉헌식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 : 1-2상)

Ⅰ. 무제

일제치하 벗어나고부터 연이어 6.25전쟁으로 감리교회가 남북으로 갈리어 북쪽은 억류되어 결국 괴멸되었습니다. 한국감리교회 김유순 감독은 납북되었습니다. 감독 유고가 되자 미국 감리교회 모어 감독이 총회를 주재한 이후 남쪽 감리교회가 가까스로 살아남아 괴멸을 면한 이들과 2010년 12월, 오늘의 감리교회 마당에 서서 이야기 좀 해보자하는 것이다.
긴 이야기도 아닙니다. 현실을 도피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부끄럽거나 망설일 필요도 없습니다. 앞날을 모르고 1954년 3월 총회 때에는 다음 총회가 평양 남산현감리교회에서 개회될 것으로 결의하여 기록하여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되었나요. 감리교회는 내분이고 민족은 분단 고착인지 아닌지 모르고 8년이나 지난 예배당봉헌식 자리에 1958년 12월에 모였습니다. 그나마 내분이 봉합되어 총리원 총회측과 천안 총회측이 한 자리에 모여 예배드렸으니 얼마나 다행인 일이었나요. 이 예배당 터에는 아펜젤러선교사 입국이후 한국감리교회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서울 제물포 평양, 전국 각처에서 모여 우리나라가 하나였던 것을 보여주던 자리였었습니다.

이 봉헌식은 유서 깊은 제물포웨슬리예배당을 철거하고 신축예배당 봉헌하는 내리교회 성탄절 앞둔, 절기상으로 대강절 4번째 주일예배 날이었습니다.

너는 그럼 뭐냐?고 하신다면, 나는 이런 자(놈 者)입니다 라 할 것입니다.

제물포웨슬리예배당 철거 마지막 사진 촬영 때에는 모친이 4개월짜리를 등에 업고 나오시더니, 신축예배당 봉헌식에는 외조모가 외손주 세살박이를 맨 앞에 세워놓고 사진을 찍도록 배려해주는 은혜가 있었지요. 3살짜리가 무슨 생각이 있었고 의지가 있었겠습니까? 어때요. 그렇지요? 그저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서. 교회에 왔다가 사진한 장 ‘찰칵’ 할 때, 그 때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뿐입니다.

▲ 1958.12.22 주일, 신축예배당 봉헌식, 내리교회 아카시아 나무 앞, 이길극 3살

내 옆에는 김인수 장로, 그 앞에는 손위 누이가 있고. 세살박이가 그 때 오른 손을 들고 있지요. 도대체 왜, 누구를 향하여 손을 들었을까요? 이 꼬마는 검정 보자기를 뒤 짚어 쓴 사진촬영기사와 우뚝 서 높고 큰 유리원판 사진기. 뒤에는 어떤 사람들이 도열해 있는지도 모르고 앞만 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할머니, 집에 가요… 왜 이래요?’ 정도였겠지요. 지금도 그런 것 같았던 생각이 어렴풋이 나니까요. 아마도 그 때에 뇌 속에 사진기틀이 깊이 각인된 모양입니다. 이 꼬마는 나중에 뒤에 있는 홍현설 학장의 신학교 학생이 되었지요. 졸업 앨범에는 카메라 카바를 앞에 걸고 있는 세살짜리 이 아이 사진을 넣었지요. 이 사진은 선친이 이날 봉헌식날에 교회 아카시아나무 앞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그때는 살았으나 지금은 소천된 사람들과 무슨 생각이 있었는지 물어봅니다. 그것도 독백으로.
‘오늘 감독님들과 교회 지도자 여러분들이 섬기는 한국감리교회가 소요가 있을 때에 해결하려고 무슨 말씀들을 한 것이 있으면 말해 보세요. 그래도 뭔가 해결하려고 협상자리에 나왔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감리교회의 어른들답게 한국감리교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눅 19 : 40 – 42). 그렇겠지요. 이 나이 먹은 아이는 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 존스 선교사가 건축하여 1901년 12월 25알 입당한 제물포웨슬리예배당

▲ 제물포웨슬리예배당 자리에 윤창덕 목사가 1958년 12월 22일에 신축봉헌한 내리교회예배당

Ⅱ. 철거 – 신축 – 복원

한국감리교회는 다양하고 중요한 큰일들을 제물포웨슬리예배당에 모여 해냈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세홍 목사 담임 시절에 이 유서깊은 예배당을 1955년 9월 4일 이후에 철거하였습니다. 총리원 총회에서 이탈한 천안측에 참가하였던 한세홍 목사(제19대 1951-1956)가 이임 전에 총리원측으로 돌아왔습니다. 천안총회의 감독인 김응태 목사는 내리교회 담임목사(제14대 1938-1941)였었고, 천안총회에 뿌리가 되는 복흥파 감독이었던 강태희 목사 역시 내리교회 담임목사(제18대 1948-1950)였었습니다. 인간적이고 신앙적인 써클에서 벗어나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천안 호헌측은 강태희 – 김응태 – 한세홍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할 것이나, 한세홍 목사는 총리원측으로 돌아섰습니다. 놀랍습니다. 거기에는 울타리와 끈에서 헤어나올만한 어떤 힘과 자각이 있었을 겁니다. 그것이 궁금합니다. 한세홍 목사의 그 때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한세홍 목사님을 좋아합니다. 저에게 유아세례를 주셨거든요. 이 와중에 헨델의 ‘메시야’ 1954년 12월 22-23일 양일간 한국 초연을 하고, 이 예배당 철거되었으나 1955년 2회 시공관과 1956년 3회 시민회관에서 연주되었고 크리스마스 성탄절에 연주되었던 내리성가대의 이 ‘헨델의 메시야’ 연주는 이것으로 그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22년 공백기를 거쳐 1978년 10월에 가서야 제4회로 ‘헨델의 메시야’의 선정된 곡들로 주안시민회관에서 연주되었습니다. 이때는 세살박이 아이도 신학생이 되어 베이스의 선친과 참가하였습니다. 1957년부터 ‘메시야’ 연주가 그치기전 공교롭게도 총리원측과 천안측이 분립상태에 있었으며 한세홍 목사가 천안총회 측에 머물던 기간이었습니다. 감리교회의 분립 소요사태는 성가대의 ‘메시야’ 찬양도 그치게 만들었고 그 발전이 정지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세홍 목사가 이임하면서 평양 성화신학교 동창인 윤창덕 목사가 후임으로 왔습니다. 윤창덕 목사 담임후 3년여에 걸쳐 예배당 신축확장을 마치고 봉헌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자리에 역대 담임목사였던 천안측 김응태 감독이 참여하였으며, 총리원 류형기 감독 등 임원들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3살 이었고 함께 있었다’는 에피소드가 시작되고 있었던 겁니다.

▲ 1958.12.22, 인천내리교회 봉헌식, 총리원측 호헌측 참가

김응태 목사 입장에서는 역사적 제물포웨슬리예배당 자리에 신축예배당을 봉헌한다니 올 마음도 있었을 터이고, 마침 총리원측과 천안측의 화합 분위기가 무르익어있었던 차였습니다.

세살박이가 이제 감리교회 목사가 되어 이런 말 같지 않은 말-에피소드라고 하면서-을 하고, 사람들은 이걸 무슨 글이냐 하고 들여다보고 있지나 않습니까? 저는 죽은 자들에게 독백합니다. 조금 고상하게 말하면 소천되신 분 또는 재천해 있는 분에게 말해봅니다. “내 영혼의 피와 살이 된 감리교회가 오늘 왜…이렇게까지…. 이제 무슨 말이든지 들어볼 만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 조금은 압니다. 저도 이번 선거에 참여하여 동조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저도 이번 일에 일정부분 죄 없다 말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아십니다.”

죽은 자들과의 대화라니. 마경일 목사도 감독이시고, 윤창덕 목사도 감독이시니. 홍현설 목사도 감독이 될 수 있었던 학장이셨고, 송정률 목사는 미국 목회를 하러 가셨고, 류형기 감독은 은퇴 후에도 계속하여 여러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셨고, 김응태 목사도 감독이시고, 내리교회 박완규 장로는 교회가 어려울 때 크게 쓰임 받으셨다지요. 외국인 여자 선교사는 확인을 해보니 얼마 전에 소천하신 메리언 킹슬리 선교사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사, 케이트 쿠퍼 선교사’를 영어로 저술하신 책을 양재서 목사가 한글로 번역하여 홍보출판국에서 책 만들어가지고 2004년 4월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뵈올 때, 그 여선교사님은 라이스 선교사님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도 그때는 감리교회를 염려하면서 하나되기를 염원 하셨습니다. 메리언 킹슬리 선교사님은 두 해전에 소천하셨습니다. 모두 한국감리교회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수고를 많이 하신 분들입니다. 선교사님들은 평생을 우리나라를 위하여 사셨는데… 또 다시 독백으로 돌아와서.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렇게 죽어 말 못하는 이들과 독백이나 하는 것입니다. 하필 이때에.

‘주 성령님이여 그때에 그 소요 분립의 시대에 이 분들 마음에 역사하시던 좋은 쪽의 마음을 오늘도 주시옵소서. 주님의 종 아펜젤러는 들이박은 배에 올라서서 살 수 있었지만, 한국인을 위하여 죽는 줄 알면서 타고 오던 배가 들이받혀서 가라앉고 있자 배로 다시 내려서, 한국인들과 배와 함께 수장 당하셨습니다. 주 성령님이여, 아펜젤러의 그 때 그 마음만큼은 아니더라도 주시옵소서. 그 만큼은 감당하기가 사실 어렵습니다. ’

소천하여 재천하고 있는 1958년 감독들과 지도자들에게 독백을 하면서 이런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엔돌에 신들린 여자를 사울이 찾아가서 ‘이러 저러한 사람을 찾아 올리라’는 말을 했다가 엔돌의 신들린 여자가 사무엘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경악하였답니다. 사울이 블레셋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사무엘을 요청하였다고 하는데(삼상 28 : 7 – 19). 나는 이런 것을 믿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있으니까 생각이 나서 하는 말입니다.

지금의 갓난아이들과 청소년소녀들이 우리 한국감리교회 지금의 사태를 모르겠지요. 그러나 나중에 커서 알고 나면 “왜 그때에 전도와 너무나 밀접한 일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였지? 그리고 우리들도 생각 좀 해주시지.” 아니면 “그때 처리를 잘하셨군.” 나는 후자의 말처럼, “그 때 잘 처리하여 오늘 우리 한국감리교회가 더 발전하고 전도의 열매를 더 많이 거두어 하늘 곡간에 넣을 수 있었지.”라고 말하는 미래의 감리교회 세대가 되었으면 해서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들어 아는 평범하면서 사실적인 이야기가 있지요.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그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우리 세대가 아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대가 하는 일이지요. 그 애들이 커서 기록하기를 ‘전도와 민족을 위하여선 신경은 쓰셨군.’ 해야 될 것입니다.

왜 내가 그 사진에 찍혀서 이런 일에 이런 말을 해야 합니까.
“그때 총리원은 감리교회 법대로 하질 않고 기록에 남겼고, 천안측은 힘이 약했지만 감리교회의 법을 주장하였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감리교회가 감리교회 법을 어겼다. 이 말이지요. 형편이 있었습니다만. 그래서 소요도 일어난 것이고.

1951년 11월 2일 오후 3시, 부산시 대청동 중앙장로교회,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를 모어 감독(Bishop Arthur James Moore, 미국감리교회 감독회장)의 개회선언으로 시작하여 총회서기로 박설봉 목사, 부서기 박래철 목사를 선택하고 회원을 점명하니 66명 전원 참석하였습니다. 김유순 감독님 납북으로 유고 감독 선거에서 류형기 목사가 감독으로 피선되었습니다. 그러나 감리교회 장정 105단 제12항 1조에서 “연회에서 정회원으로 6년 이상을 계속 시무한 이”(43단)로 규정되어있는데, 류형기 목사는 일정말기 친일교단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정춘수 통리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파면된 기록이 있다. 파면통지….. 1949년 4월….. 부활구제…연회원자격의 계속성 인정…(중략) (김광우, 한국감리교회백년사-제도변천기)
11월 2일 오후 5시, 감독사회로 ‘부산 피난총회’를 속회하고 교섭위원장 장세환장로의 보고를 받고 모어감독이 개인 소감과 의견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습니다.

“한국에 있는 감리교회가 어려운 시기를 경과한 까닭으로 감리교장정의 6년 계속 시무라는 조문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 조항을 이번 총회기간만 적용한다는 법적 기록을 남기고 지나간다면 될 것이다. 곧 「6년 계속시무」의 조항을 이번 총회기간만은 보류하기로 하자는 의견이다. ”

▲ 1954년 총리원측과 호헌측 합동 조인

▲ 1978년 김창희 감독과 조피득 총회장 (합동)

▲ 참회하고 하나되어 부흥하는 감리교회

이렇게 해서 류형기 감독임기 4년이 지나가다가 1954년 3월 18일(목) 오전 9시 30분 서울 정동교회에서 기독교대한감리회 제7회 총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개회 이전부터 감독선거, 헌법개정, 감독 임기문제, 감리사 파송, 총리원 행정 문제 등 많은 논란이 예고되었었습니다. 여기에 류형기 감독의 달러(선교불) 파동과 또다시 ‘6년간 계속 시무한 자’ 헌법 조문 해석에 의의제기는 결국 류형기 감독 재선에 따른 호헌측 감리교회 교단 분립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호헌측은 1955년 3월 1일 천안에서 전국신도대회를 열고, 헌법을 옹호한다는 ‘비상조치규정 4개조’를 채택하였습니다. 다음 날, 위의 조치법에 의하여 연회 및 총회를 열고 김응태 목사가 감독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총리원측과 3여년을 대립하다가, 1958년 10월 제8회 총회에서 김종필 목사가 감독 피선된 후, 1959년 3월 연합연회 때 호헌측이 총리원측과 재결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총리원 측에서는 천안 호헌측의 김응태 목사를 감독으로 인정하지 않았었으나, 2005년 ‘감리교회인명사전’에는 김응태 감독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총리원측과 천안측에 이해관계가 55년이 지날 즈음에, 당시에 봐서 갓난아이에 불과한 이들이 목사나 교수로서 감리교회역사 집필진이 되었습니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기록하였으나 당시와는 조금 달리 표현하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총리원측은 류형기 감독이며, 호헌측은 김응태 감독이라고. 이해관계가 심각하지 않은 새로운 세대와 시간이 해결해 준 것입니까?

1955년 3월 천안 호헌파동이 생길 때 저는 출생 2개월 전 이었습니다. 다음 세대는 2008년부터 2010년 또는 2012년까지 현 사태를 더 혹독하게 기술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려받은 한국감리교회의 영적 유산을 너무 헝클어놨고, 제도가 무너지고 있으니. 좀더 말하면, 분명히 한국감리교회 전도의 열매 토양에 악영향을 주었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신학교들은 신학교들대로, 교회 현장은 교회 현장대로, 강단은 강단대로, 오늘의 이 사태를 말하겠지. 그러나 그때는 지금 지도자연하던 사람들은 무덤에 가 흙으로 돌아가던지, 재로 변하여 있던지 하겠지. 물론 영혼은 주님 앞에 서 있을 것이고.

Ⅲ. 철거된 예배당 복원 꿈, 감리교회 복원 꿈

아펜젤러 선교사 후임인 존스 선교사가 건축한 제물포웨슬리예배당은 190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성탄절에 입당하였습니다.
이 제물포웨슬리예배당은 기독교대한감리회 홈페이지 통합자료 감리교역사소개(영문포함)(WMV)kmc-history(1:05-08) www.kmc.or.kr/databox/databox.php/prg/kmc-history.zip 에서 한국감리교회 표지가 되었습니다. 이 예배당을 장으로 한국과 한국민과 한국감리교회에 끼친 다양한 공로 중에 몇 가지만 알아봅니다. 이런 점에서 꼭 복원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

1. 미국감리교회가 노예 문제로 북감리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와 남감리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로 분리되어 조선 선교시에도 1884년과 1895년에 각각 입국하였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감리교회가 두개로 분립된 감리교회가 이 예배당에서 1902년 3월, 남감리교회와 북감리교회가 연합으로 신학회로 모였고, 1905년 남• 북감리교회 합동교육위원회, 1907년 남• 북감리교회 교역자양성기관인 협성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북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가 합동하여 1930년 12월 2일-3일, 서울 협성신학교에서 기독교조선감리회 제1회 총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미국에서 분립된 두 감리교회가 조선에서 하나가 되게 되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합동 후 미국에서 남, 북감리교회가 다시 하나되어 오늘에 이릅니다.

▲ 1902년 12월 한국인 하와이 첫 이민선 USS GAELIC(고베-하와이) (제물포-고베, 겐카이 환)

2. 1901년 12월, 조선정부가 추진하다 불발로 그친 하와이 사탕수수밭 채취 이민사업을 존스 선교사를 중심으로 추진하여, 한국인을 세계로 나아가게 한 세계의 첫발을 띤 하나님 은혜의 장이었기도 하였습니다.

3. 내리교회의 초신자였던 김기범이 한국인 최초 목사가 담임했던 내리교회의 제물포웨슬리예배당이기도 하였습니다.

4. 1907년 내리교회 유지 박삼홍이 군악기와 소총 다수를 학교에 기증하여 우리 민족이 일제에 위협을 받을 때에 민족 구원을 위하여 집총훈련을 하며 고종황제 앞에서까지 자랑이 되던 청년학생들이 예배하던 곳입니다.

5. 헨델의 ‘메시야’ 53곡을 1954년 12월 22-23일 한국 초연한 성가대가 있었으며, 악보 3권 1질이 유일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이 날 성가대 베이스 부친과 모친 태중에서 이 예배당에 있었습니다.

▲ 선친 이선환 장로 싸인 3권1질의 현존 ‘헨델의 메시야’악보, 1954.12.22

그래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교회 확장이라는 뜻에서 입당 54년만에 철거된 예배당이 되었지만, 한국감리교회가 총리원측과 천안측으로 분리되어 소요 사태를 통과하던 때였는데, 유서 깊고 역사적 장이었던 이 예배당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철거 51년 되던 해에 복원기본설계도(A1) 6장이 완성되었고, 56년 만에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예배당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영원히 사라질 것 같았던 제물포웨슬리예배당.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주 예수님 덕분에 하루살이가 영생을 살게되는 기쁨이 있답니다.

▲ 1907년 영화학교 군악대와 담총군사훈련, 제물포웨슬리예배당 뜰

▲ 1907년 영화학교 군악대와 담총군사훈련, 제물포웨슬리예배당 뜰

마치 누가복음 2:28에 시므온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던 것만큼의 감동은 되지 않더라도. 저의 기쁨을 누가 알겠습니까. 어느 분이 복원건축하던 좋습니다. 다시 이 땅위에 그 모습을 보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 역사적 사건들을 유추하며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배당이 1955년 9월 4일, 철거되기 전 예배당과 마지막 전교인들을 사진 촬영하였는데, 출생 4개월 된 나는 모친의 등에 업혀서 사진에 찍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신학교 졸업하고 교회를 개척 담임하면서 철거되어 사라진 내동의 제물포웨슬리예배당을 다시 세워 보고픈 소박한 꿈이 있었지요. 사실 이 예배당의 복원은 인천내리교회에서 해볼만한 일이었지만, 1985년 당시 누구도 이 예배당복원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 예배당과 함께 하였던 옛 추억을 그리워하는 교회 어른들만 있었습니다. 이런 중에 저는 1985년 6월 11일에 인천시지만 시외곽 같은 동춘동에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날은 공교롭게도 아펜젤러 목사님의 순직 추모일이었습니다. 물론 똑같이 83년 전 그 날은 아니지요. 제가 찾아들어온 동춘동은 동막, 자앞, 능허리, 농원, 소암 시듬물, 논밭과 구릉, 동춘동 앞바다, 염전 지역으로 송도유원지 동쪽이었습니다.

▲ 1955년 9월 4일,제물포웨슬리예배당, 철거전 마지막 촬영

▲ 1955년 9월4일 주일예배후, 제물포웨슬리예배당,모친 등에 업힌 이길극 생후4개월(사진 네모 안)

결과적으로 1985년부터 21년 걸려 재구성도면(복원설계도)이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미 언급한대로 2006년 10월 15일 주일 오후 내리십자가예배당 복원위원회에 참석하여 설계도면을 아무 조건 없이 제공도 하였습니다. 2년 전, UMC 2004피츠버그 총회에 중부연회회보 ‘교회와 목양’ 편집장 겸 기자(Central Conference, Korean Methodist Church, Credentialed News Media)로 총회 감독석에 근접하여 사진 촬영도 하였는데, 회의장 중앙에서 사방주위를 살펴보니, 1000명 가까이 되는 총대들이 총회석을 이탈하지 않았고 오히려 대기하는 사람들이 참석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도 아침 8시 30분 이전에 모여 밤늦게 까지 모여서 의결하는 모습이 참 부러웠습니다.

마침 총회장소인 데이빗 로렌스 컨벤션 센터에 오고 가다가 제물포웨슬리예배당을 건축한 존스 선교사의 이 예배당 관련 저널과 보고서를 가진 김효신 목사를 만나 명함을 받아두었던 것을 내리교회 담임목사에게 전달하였습니다. 내리교회 복원위원회는 예배당 건축의 역사적 자료가 현존함을 확인하였고 그 자료기록들을 복원계획서에 수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첫 번째 복원위원회 자리에서 이 역사적 예배당의 정식 명칭이 내리십자가예배당이 아니고 ‘제물포웨슬레예배당’이라는 것도 한국감리교회사를 인용하여 밝혔습니다. 이후 현대 표기로 제물포웨슬리예배당으로 호칭하기로 하였습니다.

▲ 동춘감리교회 1985년 첫해 주보. 제물포웨슬리예배당 스케치

현재 그 내동의 담임목사와 교인들은 2006년 가을 10월 15일에 제공한 제물포웨슬리예배당 복원설계도를 기초로, 정동 벧엘예배당이 화재 후 실측 복원 건축을 한 다담건축사무소에서 시공설계도면을 준비하여 2010년 9월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철거 56년 만에 복원이 되고 있어 저에게는 꿈같기도 하고 기적 같은 일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일입니다. 꿈을 가진지 26년 만에 꿈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결과 자연적으로 제물포웨슬리예배당 복원 대신에 ‘한국기독교 최초 목사 김창식 김기범 기념예배당(한목기념예배당)’을 건립하기 위하여 기본 설계도를 이미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주심이었으며 인도하심입니다. 짧게 이야기하려고 하였는데 길어졌습니다.

제가 하고픈 말입니다.‘감리교회 질서회복을 위한 새로운 꿈을 꾸어봅니다.

주 하나님께서 1883년(고종 20년) 구한말 고종황제의 방미수신사절을 동원하여 시작하고 준비하신 한국감리교회를 통하여 이루실 선교 역사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한국감리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제물포웨슬리예배당이 철거되어 사라졌다가 제 나이 56살이 되는 해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이제는 제도가 무너지고 있는 저의 신앙의 근간인 기독교대한감리회를 복원하여 주시기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감리회본부의 원상 복원도 이루어 주시기를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우리 감리교회 목사님들이 더욱 감리교회를 위하여 일하자는 것입니다. 개체교회 감리교회마다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하지요.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일이고, 사회에 봉사하는 일. 그리고 각자 목사님들의 받은바 은사대로 사시면 되는 것이고. 깨닫고 나니 시간이 전광석화입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지냅니다. 제물포웨슬리예배당 복원이 지난 21년간의 설계도 준비로 꿈이 헛되지 않았던 것처럼. 꼭 제가 짓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라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짓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모두가 감리교회 목사님이고 교인들이니. 물론 모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겁니다.

제물포웨슬리예배당이 복원되고 있듯이, 한국감리교회가 복원되기를 꿈꿉니다.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우리나라 백성들에게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온 국민이 2002년 월드컵축구 때에 확인하지 않았던가요. 2002년 월드컵 축구 4강 진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감리교회 목사님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어느 정도 여과하시고, 어떻게 새롭게 시작하시렵니까.

이제 모두가 목사님들이 귀한 줄을 뼈에 사무치게 알아야 합니다.

▲ UMC 2004 피츠버그 총회석(앞: 감독 석, 중앙: 총대 석, 뒤 주변: 교체준비 총대석)

한국감리교회의 모체는 영국감리교회(The Methodist Church)와 미국감리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미국감독감리교회)였습니다. 우리 한국감리교회는 현재 내용으로 감독을 정점으로 운용되는 한국감독감리교회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올해 2010년이 한국감리교회 자치 80년이라는 근거는 총리사(총감리사, 감독)가 세워진 1930년부터 계산하는 연유입니다. 교회 치리는 감독과 감리사가 하지만, 역시 주님의 몸된 교회의 양떼인 성도들 목양은 목사가 앞장서는 근본임이 틀림없습니다. 감독이나 감리사도 목사만이 될 수 있지요. 감독과 감리사는 개체교회 혹은 기관 소속 목사 선도사 혹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현장 목회와 사회 봉사를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만 잘 해주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 한국감리교회 영남선교대회

이제 한 말씀 더 생각해 봅니다. 사실 제가 부족해서 그렇지, 한국감리교회 목사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한국감리교회는 1901년 5월 14일 한국인 토착 원주민 목사가 세워지면서부터 한국감리교회 자치의 기원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요즘 들어서 더욱 생각되는 겁니다. 1930년 12월 총회에서 총리사(총감리사, 감독)가 세워지면서 한국감리교회가 자치를 시작한 것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국감독감리교회가 현재 장정을 토대로 계속 될 겁니다. 그러나 올해 2010년 12월은 한국감리교회 자치 109년이라고 마음에 담아놓습니다. 그러면서 감독을 정점으로 보아 한국감리교회 자치 80년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덧붙이면, 저는 저의 1대에서 목사로 마칩니다. 그렇기에 감리교회 모든 목사님들이나 평신도 가정의 자녀들 중에 목사가 될 사람이라면 너무 좋습니다. 한국감리교회 목사를 하나님께서 웨슬리와 아펜젤러와 김창식 김기범과 같이 계속 사용해 주실 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정하신 그날까지.

5-3-15

한국감리교회를 하나님께서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겁니다. 그래서 아직 한국감리교회가 일찍이 사용해본적인 없는 능력을 발휘할 겁니다. 한국감리교회가 일찍이 알려지지 않은 능력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에, 처음에는 낯설기도 하고 놀라웁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다만 주 성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다시 말하고 생각하고 믿지만 한국감리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관리하실 것입니다. 저는 마가복음 2장 22절을 좋아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은 항상 변함없으시지만 인간이 볼 때에 늘 새롭습니다. 인간 편의 새 것은 항상 새롭게 변화되어야 새롭습니다. 그때에야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한번도 사용해 본적이 없고, 알려지지도 않았고, 이상할 만큼 낯설고, 놀라울 만큼의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우리 감리교회의 존 웨슬리가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세살박이 오십오된 이길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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